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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문화/예술/공연
정간물명   월간에세이
게재월   2016년 02월
제목  내 삶의 동반자를 넘어서 - 만남 / 전광우, 연세대 석좌교수, 초대 금융위원장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고 삶의 궤적은 만남으로 결정된다. 만남이란 의미의 영어 Encounter는 ‘굳이 계획하진 않았지만 중요한 만남’이란 뜻인데, 특히 어려움이나 도전에 직면할 때 Encounter라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그렇게 보면 정말 귀한 만남은 기쁨보다 오히려 힘든 시간을 나눈 만남이 아닌가 싶다. 노을은 적당히 구름 낀 하늘에서 더 아름답고, 무지개는 비 온 후 더 경이롭게 피어나는 것처럼.

“…우리 결혼한 지 30년이 넘었어요.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강도 건너고 언덕도 넘고 때론 숲 속을 헤매기도 했지요. 그래도 둘이 같이 잘 왔어요. 앞으로 30년도 둘이 손 꼭 잡고 건강하고 아름답게 갔으면 참 좋겠어요….”
세 자녀의 엄마로 교회 음악과 오르간을 전공한 나의 아내 하정화 박사가 몇 년 전 국내 언론사와 했던 인터뷰 내용 일부다. 그와 같이한 여정(旅程)은 축복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다소 화려한 이력이나 외관상 풍기는 느낌 덕분인지 나는 고속도로로 달려온 복 많은 사람이란 말을 종종 들어왔다. 그러나 내용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오르막 내리막이라는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피할 수는 없다. 진정한 축복은 ‘고난 없는 삶’이 아니라 ‘고난을 나눌 사람이 있는 삶’일 것이다.

우리의 첫 만남은 미국 유학 시절 캠퍼스에서였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비슷한 문화적 배경과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어머니를 일찍 여읜 아픔을 공유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둘 사이는 무척 빠르게 가까워졌다. 오랜 세월 같이 지내온 삶의 동반자에게 고마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무엇보다 우리 가정생활과 나의 사회활동을 든든하게 뒷받침해준 것은 아내의 ‘위로자(Comforter)’와 ‘조언자(Counselor)’ 역할이었다.
대부분 신혼살림이 그렇듯 우리도 결혼 초 형편은 어려웠다. 월급 받아서 아파트 월세, 식비 등 떼고 나면 은행 돈 빌리기가 일쑤였다. 결혼 후 4년 남짓 사이에 아이 셋을 연이어 가진 높은 생산성(?) 덕분에 시간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매우 힘든 시기였다. 더군다나 막내의 잦은 병치레로 아내는 수많은 나날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불평과 한숨 소리가 나올 법한 상황이었지만 힘든 내색 없이 늘 밝은 모습으로 세 자녀를 키우면서 박사학위까지 끝낸 아내의 열정과 긍정의 힘은 나에게 용기와 희망의 원천이었다. 그 덕에 나는 세계 각국을 수시로 출장 다녀야 하는 국제기구에서의 소임을 감당할 수 있었다.
내 인생의 결정적 시기 중 하나는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세계은행으로 옮긴 1980년대 중반이었다. 자녀 교육이나 생활환경만 생각하면 남편이 조용한 캠퍼스에서 대학교수로 지내는 편이 훨씬 좋았겠지만, 아내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로 이사하는 일에 앞장섰다.
더 어려운 결단의 시점은 1998년에 찾아왔다. 세계은행 종신직으로 있던 당시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한국 정부 초청을 받고 고심할 때, 또다시 아내는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보람이 큰 도전의 길을 권했다. 다른 사람들은 IMF 사태로 미국에 이민 오려는 판에 ‘꿈의 직장’을 버리고 귀국하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주위의 만류가 컸지만 우리는 20여 년의 해외 생활을 접고 귀국길에 올랐다. 공직 재임 중 큰딸 혼례를 비밀리에 ‘작은 결혼식’으로 치른 것도 아내 뜻이었다.
수년 전부터 결혼식 주례로 초대받곤 하는데, 내 주례사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는다.
“…부부간의 애정과 행복한 결혼은 희생과 헌신으로 만들어지는 작품입니다. 때문에 신랑 신부는 앞으로 한 편의 감동 드라마, 아름다운 영화를 평생 같이 만들기 바랍니다. 영화는 영어로 필름(FILM)이라서 F, I, L, M 자로 시작되는 네 단어로 당부 메시지를 전합니다. 첫째, F는 Faith, 신뢰와 믿음입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은 성공적인 결혼의 필수조건입니다. 상대의 강점은 키워주고 약점은 보듬어주는 진정한 파트너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I는 Integrity, 성실과 품격입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켜야 하듯이 서로의 인격을 존중함으로써 품위 있는 가정을 꾸미기 바랍니다. 셋째, L은 물론 Love, 사랑입니다. 기독교 성경 말씀처럼, 서로 인내하고,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넷째, M은 Money가 아니라 Memory, 추억입니다. 행복한 결혼이란 좋은 추억을 만드는 과정이며, 특히 아름다운 추억은 귀한 자녀와 더불어 만들어지는 만큼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데에도 모범이 되기 바랍니다….” 이 주례사는 아마도 우리 부부의 지난 35년 동행(同行)을 통한 체험적 메시지인지 모른다.
아내와 나는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란 시를 좋아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다”라는 대목은, 나이가 들어도 열정을 갖고 사는 한 우리는 늘 젊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그렇게 우리의 좋은 드라마가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미국 미시간 주립대 교수와 세계은행(World Bank) 수석 이코노미스트 역임. 한국 정부 초청으로 귀국해, 국제금융센터 원장과 우리금융그룹 부회장 등을 거쳐 초대 금융위원장,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역임. 현재 연세대 경제대학원 석좌교수.





           [출처] 월간에세이 (2016-02)
           본 콘텐츠는 발행사에서 제공하였으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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