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남긴 이 명언은 오늘날에도 자주 회자되며 그 넓이와 깊이를 더하고 있다. 19세기 한 낭만주의자의 묵직한 말은 시간을 넘어 또 다른 학자의 펜촉에 실린다. 한국이라는 낯선 공간, 외국인이라는 낯선 시선으로. 타자의 프리즘에 투과된 에세이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는 그래서 우리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명경(明鏡)이 된다.
이처럼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운 펜촉으로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예리한 필체로 담아낸 그는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Emanuel Pastreich, 이만열, 54) 교수(경희대)이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해 한때 건축가를 꿈꿨던 그는 예일대에서 중문학을, 일본 동경대에서 비교문화학 석사를, 하버드대에서는 동아시아 언어문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중국과 일본에 이어 한국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학문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지식의 노마드(Nomad)인 그를 매서운 칼바람이 불던 어느 날,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나보았다. “성적 입력에 여러 일들이 겹쳐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라며 멋쩍게 웃던 그는 책들로 가득 찬 가방을 내려놓으며 먼저 악수를 청했다. 인터뷰에 주어진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서 그가 펼쳐낼 삶의 책장들은 어느 정도의 무게와 빛깔일까. 그 첫 장을 살며시 열어본다.

# 과거, 오늘을 묻다

한자의 표상적인 기능과 문자에 깃든 철학과 사상에 이끌려 일찍이 독학으로 한자를 익힌 그는 80년대 초 당시, 중국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중심국이 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의 가지는 그를 대만 유학길에 오르게 했고, 이후 일본에 대한 관심으로, 다시 한국에서의 정착으로까지 뻗어나갔다. 오래전부터 한국 고전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방인의 낯선 시선으로 새로운 가치들을 발견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다산 정약용의 서간문들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한국은 유교사상 안에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해온 전통이 있어요. 태극문양이 이를 상징하죠. 조선시대에는 주로 예의범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문제의식을 드러냈어요. 고전소설을 보면 ‘어떻게 많은 사람들과 예의를 지키며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공동체 의식에 중점을 두고 있죠. 물론 체면문화 등이 외국인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오히려 저는 서양사회에 고질적인 병폐와 심각한 문제들이 더 많다고 생각해요.”
그가 읽어낸 한국의 정체성은 인문학의 전통으로부터 기인한다. 때문에 고도성장으로 모든 것을 수치화하고, 기술·경제만을 중시하는 현 시대에는 더욱이 인문학의 가치를 재고하는 건설적인 논의와 담론이 필요하다고 했다. 17~18세기에 발전한 예학(禮學)이 법률보다 강한 지침서, 즉 하나의 거버넌스(Governance, 국가경영)라는 점도 덧붙였다.
“저는 선비사상, 다시 말해 지식인의 책임과 사명감을 본받아야 한다고 봐요. 당장의 목표, 다음 선거가 아닌 국가를 위해 500년을 내다본 창의적인 계획을 세워야 하죠. 언젠가부터 ‘빨리빨리’ 문화가 유리하게 작용해왔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500년 전통의 우수한 행정시스템과 국민들의 노력을 발판으로 오늘날의 한국이 탄생했어요. 소수의 지도자, 일부 대기업만의 공으로만 돌릴 순 없죠. 이러한 역사적인 경험과 노하우로 새로운 방향을 잡고 전략적으로 근대화와 산업화에 성공한 거죠. 제국주의 정책이나 유산 없이 오로지 학문에 대한 열정, 윤리·도덕의 전통을 기반으로 선진국이 된 최초의 사례라고 볼 수 있어요.”

# 세계 속의 한국, 한국 속의 세계

한류는 문화의 추상적 가치를 물질적 가치로 환원시킨 거대한 산업이다. 하지만 양적 성장에만 기대어 제대로 된 가치평가를 내릴만한 기회를 갖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모래성처럼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는 이 연약한 토대를 단단히 세울 수 있는 것은 ‘한국의 본질’을 담은 콘텐츠이다. 그는 이를 ‘문화적 연속성’으로 부연했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역할은 많이 달라졌지만, 문화콘텐츠에 대한 올바른 투자와 혁신은 아직 갈 길이 멀어요. 가구, 한복, 한의학, 건축, 사상 등에 대한 제대로 된 자료도 없고, 세종에 대한 소개마저도 부족하다는 게 안타깝죠. 한국과 인연이 없는 사람도 인문학과 문화에서 보편적 가치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해요. 문화적 접점을 찾는 거죠. 단순히 감정적으로 한국이 ‘좋다’가 아닌 객관적인 비판과 전략이 절실해요. 문화적 연속성에서 말이죠.”
그렇다면 문화적 진화와 진보를 추동하는 창조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그는 선진화 된 교육과 교육적 인프라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활발한 비평과 토론문화가 상상력(Imagination)의 근간임을 강조했다. 사이비 창의성을 지양하고 깊이 있고 특별한 한국문화를 재창조한다면 세계인들의 존경과 관심이 함의된 ‘코리아 프리미엄’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단순한 물건이 아닌 어떤 ‘개념’과 ‘이야기’를 파는 것, 한류의 미래는 외연의 확장보다는 내연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학구열로 수많은 박사들이 배출되지만 대량의 인재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맹목적으로 미국(서양)을 모방하는 것도 위험하죠. 해답은 ‘한국’에 있어요. 서양 혹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와 비교해 보면, 조선시대는 상당히 민주적이고 자유의 개념도 살아있었어요. 민권운동, 과거제도 등 의미 있는 사례가 너무 많죠. 큰 흐름에 따르면, 변화를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나아가야할 5년의 주기들이 있는 것 같아요. 현 정권에 대한, 더 나아가서는 지난 10년 간 보수정권에 대한, 넓게는 고도성장의 사고방식과 전략에 대한 마무리 등, 그 시기들을 지혜롭게 넘긴다면 역사는 앞으로 향할 수 있죠.”
온고지신(溫故知新). 그가 최근 몇 개월간 별자리를 잃은 우리들에게 건넨 위로의 말이다. 성장통과 같은 지금의 위기는 과거로부터 영감을 받아 길을 모색하고, 창의적으로 발전시킨다면 극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기술과 문화, 비즈니스 등 전 분야에서의 발전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역할은 그저 새로운 것을 제안하고, 조그마한 자극제가 되어주는 것이라며 넉넉한 미소를 지은 그는 누구보다 한국의 미래가 기대된다고 했다.
우리안의 이방인을 없애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길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변함없이 변화해야할 지금, 그의 말들이 더욱 뜨겁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주요저서: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세계석학들 한국 미래를 말하다><연암 박지원의 단편소설 The Novels of Park Jiwon: Translations of Overlooked Worlds><중일 고전소설의 세속성 비교 관찰 The Observable Mundane: Vernacular Chinese and the Emergence of a Literary Discourse on Popular Narrative in Edo Ja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