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한 뒤에 글을 쓰겠다는 사람들이 주변에 의외로 많은 것 같다. 더러는 내게 소설가로 성공했으니 부러울 게 없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반 농담으로 “글로벌하게 사는 게 지겹습니다. 전생에 지은 죄가 많은 모양입니다”라고 하면 의아해 한다. 내가 한 말을 세계적이거나 전반적인 것을 뜻하는 글로벌(Global)로 알아듣기 마련이다. 그쯤에서 나는 글로벌이 ‘글로 벌을 받는 게 글쟁이’라고 말해주어 한바탕 웃음판을 만든다. 
세상사가 소설보다 100배나 재미있으니 책이 더 팔리지 않는 것 같고 글쓰기는 어려우며 밥벌이도 되지 않으니 전업 작가로 살 수 없어 글쓰기를 부업으로 삼는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한동안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블랙리스트’는 문화예술인들의 목을 조른 잔혹사이고 가해자들에 대한 심판은 분명 현대사의 치욕으로 기록될 게 뻔하다. 인류 역사상 배고픈 이의 밥을 빼앗고 아픈 이의 약을 빼앗고 배우려는 이의 학비를 빼앗는 것은 가장 비열한 범죄에 속한다.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피의자 중 한 명은 간교하게도 이것을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말해서 시대의 비극을 확인해 주었다. 
내가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연을 추적했더니, 2015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단 한 번의 사랑> 때문이라 했는데, 아무리 뜯어보아도 시빗거리가 될 만한 것이 없었다. 소설 내용 중에 친일파들이 독립유공자 심사를 했다는 것과 그들의 실명을 밝힌 것과 친일파 후손들은 떵떵거리며 살고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어렵게 사는 걸 비판한 것밖에 걸려들 게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글을 쓰는 게 벌받는 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신문의 부고 기사를 보고 잊을 수 없는 인물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한동안 미워하고 싫어했던 인물이었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절에 나를 잡아가 국가원수 모독, 체제비방, 군 모독으로 드세게 문초했던 사람이니 어찌 잊을 수 있었으랴. 계엄 때 군 모독이면 중형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역시 만년필로 꾹꾹 눌러 쓴 <도둑놈과 도둑님>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세월이 약이요, 미운 사람 털어버리는 게 마음 다스림이요, 용서하는 게 영혼의 사탕을 먹는 것과 같다는 스승의 가르침이요, 이미 그의 사과를 받고 용서했다고 말했으니 그 약속을 지키는 게 사람의 도리라 생각하여 그를 위해 좋은 곳에 가시라는 기도와 108배를 했다. 용서는 과거에서 해방되는 참 자유가 아닌가. 용서하지 못하면 상대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것이 아닌가. 의학계에서도, 용서하지 않으면 면역체계에 다양한 방식으로 악영향을 준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는가.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신문 연재소설에 열광하고 유명 작가들은 요즘의 스타 연예인만큼이나 인기가 좋았고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나고 대한민국의 위상이 이만큼 높아졌는데도 어느 출판사 대표의 말대로 ‘출판사는 돈으로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추락해 버릴 만큼 문화계가 곤궁해졌다. 수렁에 빠진 문화예술계를 분탕질한 사람들은 권력을 마음껏 누렸겠지만 무수한 문화예술인들은 허기에 지쳐버렸다. 
옛말에 하늘이 친 그물은 크고 성긴 듯해도 잡아야 하는 자는 결코 놓치지 않고 다 잡는다고 했다. 나를 벼락출세시킨 장편소설은 <인간 시장>이지만, 그로 인해 자식들을 납치하겠다는 위협을 비롯해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협박과 공갈을 견뎌온 건 지금 생각해도 글 때문에 모질고 잔혹한 벌을 받은 혹독한 세월이었다. 인간에게 걱정과 두려움과 고통은 생존을 도와주는 자극제인지도 모른다. ‘글로 벌’을 받으며 살아왔기에 이 나이에도 쉼 없이 글을 쓸 수 있는 힘이 사그라지지 않는 것 같다. 만약 글 쓰는 게 쉬웠고 아무도 나를 건들지 않았다면 나는 글에게 잡아먹혔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정당한 분노는 나와 타인을 보호하는 안전장치이기에 작가는 늘 깨어있는 반골이 될 수밖에 없고 권력은 그 깨어있음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지 모른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심리학자 에디트는 “애지중지하며 응석받이로 키운 아이들이 수용소에서 가장 먼저 죽었다”라고 했다. 응석받이는 자신을 구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권력에 저항하는 예술인들의 정신이 곧 그들을 빛나게 한다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