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말, 국문학을 전공한 문학소녀에게 영어는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콤플렉스였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그 수줍음 많은 문학소녀가 글로벌 비즈니스 현장에서 달러를 벌어들이는 커리어우먼이 되었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해외 광고주와 거의 매일 소통하며 전쟁처럼 치열하게 하루를 뛴다. 영문서 작업이나 보고서, 이메일은 기본이고 SNS메신저나 유선전화로 때로는 강하게 의견을 피력하며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유쾌하게 웃으며 일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영어 실력이 아주 유창하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최근 수십 년 만에 연락이 닿아 다시 만나게 된 대학이나 여고 동창생들은 내가 영어로 비즈니스를 하며 잘 살고 있다는 말에 “나은경이 영어를 잘 한다고?” 하며 놀랄 정도로 학창시절에는 영어 기피증 환자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주로 서비스하는 관광관련 분야의 전문용어와 기본 회화 실력으로 거의 모든 의사소통을 다 해낸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여행전문지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는 ‘해외여행자유화’가 시행된 원년이었다. 매월 새로운 항공사나 외국관광청들이 찾아와 한국시장을 향해 문을 두드렸고, 나는 그런 외국인들을 만나 인터뷰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신참이 영어를 더 잘할 거라며 슬쩍 모든 영어 인터뷰를 미뤄버리는 선배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국인들을 상대해야 할 때가 많았다. 공식 인터뷰는 주로 통역이 배석하지만 서로 인사를 하거나 일상적인 대화는 직접 영어로 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답변을 하게 되거나 간혹 비서진들의 비아냥거리는 듯한 시선을 받을 때면 정말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한 적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해외 컨퍼런스에서 만났던 한 외국인 친구의 말을 상기하며 다시 용기를 내곤 했다. 동양인 여성이 너무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면 경계를 하게 되지만 약간은 부족한 영어가 오히려 상대방을 무장 해제시키며 더 많은 것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위로였다. 덕분에 영어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어느덧 자연스럽게 유창한 영어로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참으로 대견하다.
지금 이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면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어려울 거라는 본능적인 절박감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아닐까? 어느 순간, 그 자존심 때문에 이를 악물고 영어에 매달렸는지도 모르겠다. 20대 당시에는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늘 불안하고 캄캄했는데, 이제 하늘의 뜻을 이해한다는 지천명의 나이가 되고 보니 내가 좌충우돌 부딪혀가며 신기하게도 적절한 길을 참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학창시절, 길이 보이지 않아 헤매던 내가 지금처럼 멘토링 같은 걸 할 수 있었다면 먼 길을 돌아가지 않고 좀 더 쉽게 안착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이는 내가 최근 여대생들과의 멘토링에 적극 참여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런데 요즘은 한국말을 잘 하는 외국인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해외여행을 가면 국내에서 보다 훨씬 더 국격이 신장되고 있음을 체감하기도 한다. 얼마 전 모 정부기관의 요청으로 다누리 기자단과 다누리 모니터링단을 위한 홍보 관련 특강을 하러 갔을 때가 생각난다. 다누리 기자단은 한국인이지만 모니터링단은 다국적 인들이 많이 섞여있으니 가급적 쉬운 말로 강의를 해달라는 요구사항이 덤으로 묻어왔다. 강의내용은 기자단 교육이 중심이었기에 글쓰기와 사진촬영 요령 등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데 초점을 뒀다. 외모는 완전 한국인인데도 말을 더듬거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한 눈에 봐도 동남아 어딘가에서 온 듯한 인물들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문득, 20여 년 전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절박감 때문에 직장도 가정도 잠시 접어두고 1년여 간 해외 연수를 다녀왔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동병상련이라 했던가. 처음 몇 달간, 현지에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억울하기도 하고 모멸감을 맛보기도 했던 나이기에 그들의 어려움들이 느껴졌다. 덕분에 그들의 눈높이로 나를 낮출 수 있었고 강의는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 있었다. 
20대에 영어 때문에 자존심 상해야 했던 필자가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솔직함’과 ‘당당함’이었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모르니까 천천히 잘 설명해달라고 요구할 줄 아는 뻔뻔함이 무기였다. 다행히도 외국인 선생님과 친구들은 창피하다고 움츠러들지 말고 당당하게 몇 번이고 천천히 다시 물어봐도 괜찮다고 용기를 주었다. 모국어가 아닌 이상 잘 모르는 것은 당연하니까.
‘득어망전(得魚忘筌)’이라는 말이 있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어버린다는 뜻으로 ‘개구리 올챙이시절 생각 못한다’는 속담과 비슷한 의미의 고사성어다. 한국인을 사랑하고 한국문화를 동경해서, 또는 돈을 벌기위해 한국을 찾아온 외국인들을 마주칠 때마다 영어를 배우거나 돈을 벌기 위해 선진국으로 날아가던 우리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영어나 프랑스어, 이태리어를 배우고 익히며 그들의 언어로 문화 예술을 즐겨왔다. 막연한 사대주의가 팽배해 서양인들의 냉대를 견뎌가며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려고 애를 쓰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상당부분 그 잔재가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도 많고 그런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 하는 외국인들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IT의 발달로 굳이 우리가 영어를 배우지 않아도 그들이 먼저 한국어를 배워서 손 내미는 그런 날이 곧 올 것이다. 모국어로 당당하게 글로벌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