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특집 : 장래 희망

“자상한 아빠.” 내 장래 희망이 선생님의 노여움을 살 줄 꿈에도 몰랐다. 솔직하게 적어 냈을 뿐인데 교무실에 불려 가 장난치지 말라는 꾸지람과 함께 꿀밤을 맞았다.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으며 할 수 없이 바꿔 썼다. “축구 선수.”

그 시절, 나는 학교가 끝나면 집에 가기 싫었다. 집에는 언제나 폐병 앓는 아버지가 방에 눕거나 마루에 앉아 있었다. 선생님은 알았을까. 어떤 아이들에게는 자상한 아빠가 얼마나 간절하고 그리운 대상인지. 아니, “아빠.”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해 “아버지.”라 부르는 아이들도 있다는 것을.

우리 집은 변두리 초가집이었다. 사글셋방을 전전하다 텃밭 딸린 집으로 이사 갔다. 아버지는 막노동하다 추락 사고로 입원한 뒤부터 집에 눌러앉았다. 쿨럭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가난한 집구석, 문도 없이 구덩이를 파서 독을 묻고 그 위에 널빤지를 댄 변소, 비라도 오면 우산을 들고 볼일 봤던 참담함……. 맞은편 아파트에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가 살았다. 가끔 아파트 베란다에 여자애 얼굴이라도 보이는 날엔 괜히 화끈거렸다.

가난을 무조건 탓한 건 아니었다. 학교는 뭐하러 다니느냐며 성질 내는 아버지의 시커먼 얼굴이 싫을 뿐이었다. 용돈은커녕 중, 고등학생 시절까지 수업료며 각종 공납금을 못 내 교무실에 불려 가는 것쯤은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꿈은 크게 가지라던 선생님 말에 오히려 나 자신이 초라해졌던 그날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축구 선수를 꿈꿨다. 나는 운동장의 치타가 되고 싶었다. 방과 후에는 어김없이 축구공에 매달렸다. 우리 학교에는 축구부가 없었지만 나는 학교 대표로 시합에 종종 나갔다.

하루는 축구부가 있는 시내의 유명 학교와 시합이 있었다. 더 잘하고 싶었다. 차마 안 떨어지는 입술을 가까스로 떼어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 아버지. 차비 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던 아버지는 방 안에서 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던졌다. 데구르르, 마루를 뒹굴던 동전이 마침내 마당으로 툭 떨어졌다. 그날 내 귀엔 축구하는 내내 그 동전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아버지가 내게 남겨 준 거라곤 뜨거운 용기도 따뜻한 격려도 아닌, 가래 섞인 기침을 토해 내는 모습뿐이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아버지 말투와 행동이 드러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아버지처럼 되기 싫어 한동안 결혼도 꿈꾸지 않았다.

지금은 두 딸의 아버지가 된 나. 아직 자상한 아빠도 남편도 되지 못했다. 특히 피곤한 날이면 내 몸에서 아버지가 튀어나온 착각이 들 만큼 함부로 말을 내뱉었다.

자상한 아빠, 내 꿈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장래 희망 칸에도 적을 수 없는 소박한 꿈을 이루는 것이 나에겐 왜 이리 멀게만 느껴질까. 이 보잘것없지만 아름다운 꿈을 이루고 사는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이근영 님 | 전북 남원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