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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역사학을 전공으로 삼은 나는 특히 종교 사상과 건축 구성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공과대학 건축과를 졸업했지만, 전공은 인문학에 가까우니 어떤 계기로 이 길을 택했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이제는 “대학원 때 경주의 한 한옥을 보고 감동받아서 한국건축 연구를 일생의 업으로 삼게 되었다”라고 거침없이 답한다.
1970년대의 전공 수업은 미국과 유럽의 최신 건축물들에 대한 소개와 탐구가 대부분이었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도 않았고 충분한 자료도 없었던 때라 뜬구름 잡듯이 전혀 실감 나지 않는 분야였다. 대학의 커리큘럼 속에서 한국건축이란 그리스·로마보다 훨씬 더 머나먼 다른 나라의 건축이었다. 나 역시 한국건축에 무지해서 늘 미안한 대상일 뿐이었다. 한옥이란 수명을 다한 과거의 유물이고, 우리 것이니 어쩔 수 없이 사랑해야 할 못난 조상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던 중 대학원 과제를 위해 방문해서 만난 관가정(觀稼亭)이라는 한옥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은 지 500년이 지났지만 이 집은 전혀 늙지 않았다. 마을 어귀에 들어설 때 보이는 당당하고 날렵한 자태부터 아름다웠다. 집의 이름처럼 앞에 펼쳐진 너른 들의 ‘농사짓는 풍경을 바라보는 집’의 경관은 더욱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전체 면적 40여 평에 불과한 크지 않은 집이 다양한 모습을 갖는 것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렇다고 복잡하게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단순한 전체 속에 다양한 부분을 갖는 집! 현대건축을 공부하면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상적인 실체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우리 시대의 뛰어난 건축가가 설계해도 될까 말까 한 지극히 현대적인 집이었다. 그것은 바다 건너 멀리 있는 것도 아닌 바로 우리 땅에 존재하고 있던 ‘오래된 미래’이니 어찌 경탄치 않겠는가.
관가정과의 만남은 나의 학문적 관심과 태도를 통째로 바꿔 놓았다. 한옥은 이제 당당한 보편적 건축이 되었고, 역사는 무수한 현재들의 적층이 되었다. 이러한 눈으로 보니 한국 건축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건축이 새롭게 보였고, 그런 시각으로 확신에 찬 글들을 발표하다 보니 여러 기회가 찾아왔다. 그런 연고로 최연소 건축학 교수, 최연소 저서 출간, 최연소 문화재위원 등을 거쳐 현재까지 오게 되었다. 관가정은 내 학문적 여정의 출발이자 사회적 이력의 동력이었다. 최근까지 그렇게 믿어왔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문득 “관가정을 어떻게 가게 되었지?”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렇게 유명한 대상도 아니고 그때까지 한국건축에 무지했으니 그 집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건축과 동료인 그와 함께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갔고, 그 집의 존재 역시 그가 제안해서 알게 되었다. 그는 대학 신입생 때부터 야학 활동에서 알게 된 친구였는데, 사회 경험도 앞섰고 전공 지식도 깊었다. 훤칠한 키와 수려한 외모의 그는 부유한 집 장남으로 내게 부족한 많은 것들을 갖고 있어서 늘 부러운 친구였다. 또한 나를 알뜰히 챙겨 다른 친구들을 소개해주거나 많은 활동과 모임에 초대하기도 했다. 동갑임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로 선배와 같은 친구였던 그에게 크게 의지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당시의 학제는 일단 공대에 입학해서 1년을 보낸 후 2학년 진입 시에 전공학과를 선택하는 특이한 제도였다. 나는 수학과 과학이 적성에 맞지 않아 진입할 곳이 없던 문제적 공대생이었다. 그런 내게 건축과에 함께 가자고 강력하게 추천한 것도 바로 그였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건축가의 꿈을 꿨고, 내게 건축이 얼마나 멋진 전공인지 안내해줬다. 막연히 공대에 입학해 건축이라는 전공도 몰랐던 내게 정말 소중한 희망을 준 것이다. 이후의 진로도 그랬다. 그의 권유로 대학원에 진학했고, 박사과정도 함께 밟게 되었다.
젊은 시절을 생각해보면 그의 개입 없이 선택한 인생의 매듭은 거의 없었다. 박사과정 중에 다녔던 설계사무소도 그가 일하던 곳이다. 박사과정을 마치기 직전에 울산대학교에 스카우트되어 교수 생활을 시작했는데, 나를 추천한 선배 교수의 후일담이 놀라웠다. 그에게 먼저 교수직을 제안했지만 사양하며 나를 대신 추천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막 신혼이었던 내 처지를 고려해서 양보한 것이리라.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온전히 내 영역 안에서 이룬 것이라고는 연애와 결혼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의 아내는 같은 과의 다른 동료가 소개해준 친척이니, 결혼의 큰 인연 역시 건축과로 인도한 그의 미필적 고의였다고 하겠다.
‘인연(因緣)’이라는 말은 ‘원인과 결과를 묶어주는 실’이라는 뜻이다. 내 전공과 삶이 시작된 매듭은 관가정이라는 옛집이었지만, 그 매듭을 묶어준 사람은 바로 그였다. 그는 현재 학계와 서울시의 중요한 직책을 맡아 큰 길을 걷고 있다. 나도 그의 삶에 조그만 매듭이라도 묶어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하지 못해도 내가 다른 이들의 매듭이라도 묶어준 적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그에 대한 일방적인 고마움이 조금이라도 덜어질 것 같다.

* 1958년 순천 출생.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학사, 석사, 박사. 프랑크푸르트 한국정원(2005), 국가영빈관 삼청장(2010), 美 피츠버그대학교 한국실(2015) 설계. 저서로는 <한국의 건축-전통건축편><김봉렬의 한국건축이야기>(1~3편) 등 다수. 現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건축분과위원장, 아름지기 재단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