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필름’은 매달 하나의 주제를 가진 단편영화 3편을 묶어 상영하고 있다. 4월이면 3주년이 되는데, 3번째 맞이하는 ‘처음’을 축하하며 오렌지필름의 시작을 얘기해볼까 한다.

국어국문학을 공부한 나는 자연스럽게 영화에 관심을 가졌다. 국문학은 스스로 글을 쓰고 읽는 시간이 많아서 주로 혼자 시간을 보낸다. 이에 비해 영화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간다는 점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당시 신형철 평론가가 쓴 <올드보이> 평론을 읽고, 이 영화를 셀 수 없이 보면서 더 깊이 빠져들었다. 영화에 대한 관심을 시작으로 대학 시절 내내 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다양한 경험을 쌓고, 서른 살 전까지 영화 안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경험해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영화제 데일리팀 자원봉사, 영화 연출부 스크립터, 영화 배급사 인턴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러던 중 영화 산업의 가장 중심에서 직접 경험해보고 싶어서 미국으로 가야겠다는 큰 결심을 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영화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처럼 결국 감사하게도 미국으로 가게 됐다.

미국에 가기 전, 스스로 약속한 목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미국 영화사에 취직하기, 또 하나는 한국영화 배급하기. 하나만 이뤄도 큰 수확이라는 생각으로 구직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동부에서 지내면서 뉴욕에서 면접을 봤는데, 이력서를 보내고 스무 번 정도 면접을 본 것 같다. 될 듯 말 듯 계속 불합격되는 시간을 보내면서 낙담하기보다는 오히려 떨어지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매력적인 이력을 갖고 있어서 인터뷰하는 것일 텐데, 정작 인터뷰에서 되지 않는 것은 내가 뭔가 실수를 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일단 그 이유만 알면 된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러다 아예 영화 산업의 중심으로 가보자는 마음으로 서부로 거처를 옮겼다. 샌프란시스코로 가자마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영화관인 록시(Roxie theater)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이전과는 달리 외운 답이 아닌 진짜 ‘대화’를 나눴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등, 편안한 마음으로 대화하던 중 함께 일하고 싶으니 언제부터 가능한지 알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마케팅과 기획 인턴을 시작했다. 매달, 매주 어떤 영화를 어떻게 상영할지 회의하고 관리하는 일, 샌프란시스코 및 서부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참석하는 등 하루하루 믿을 수 없는 신기한 일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프로그래머가 만약 한 번의 상영기회가 생기면 어떤 영화를 프로그래밍해보고 싶은지 물었다. 늘 하던 생각이라 꽤 구체적으로 답했고, 그렇게 아주 우연한 기회에 한국영화 상영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다.

록시에서는 그동안 한국영화를 전쟁영화로만 인식해왔고, 한국영화를 상영한 적도 없다. 그 때문에 나는 한국의 ‘지금’을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를 담은 단편을 묶어서 기획했다. 좋은 작품이기에 관객이 보기만 하면 좋아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영화 상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서 다음에도 상영을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일념으로 프로젝트에 임했다.

연출부로 연이 닿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졸업작품(2003~2013)을 모두 봤고, 한국의 ‘지금’을 다양한 주제로 보여주고 싶었다. 가족, 우정, 취업, 사랑, 죽음, 총 다섯 편의 작품을 선정했고, 주 관객층은 20대 초반으로 잡은 뒤 온·오프라인 마케팅을 했다. 극장과 가까운 곳에서는 재물을 비치하는 등 홍보활동도 했다. 최초 상영이지만, 결과는 만석으로 성공적이었다. 이를 통해 록시는 한국영화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됐고, 이후 다시 상영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보람이 너무 커서인지 결과에 상관없이 꾸준히 잘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20대를 빼곡하게 열심히 살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영화가 주는 가치를 믿고, 만드는 수고로움을 경험을 통해 배웠기에 한국에서도 영화 상영회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오렌지필름의 ‘처음’이 만드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금씩 발전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이 일을 계속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아무래도 ‘처음’ 좋았던 마음이 잘 변하지 않기도 하고, 더 잘하고 싶어서이지 않을까. 영화를 통해 만난 고마운 인연들, 영화가 준 고마운 격려와 꿈꾸게 해준 시간을 포함한 ‘처음’의 마음을 잊지 않고 오랫동안 오렌지필름을 하고 싶다. “반갑습니다. 까봐야 안다, 오렌지필름입니다”라고 소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