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어포던스

“어떤 의자는 앉아서 독서를 해야 할 것 같고, 어떤 의자는 편안하게 휴식하고 싶어지고, 또 어떤 의자는 누군가와 마주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진다. 의자의 디자인에 따라서 우리가 하고 싶은 행위가 달라지는 것이다. 의자를 마주한 사람들이 디자이너의 의도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그 의자는 어포던스가 뛰어난 의자, 즉 디자이너의 의도대로 행위를 유도하는 힘이 매우 강한 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반대되는 경우도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레스토랑 세면대 앞에서 수도꼭지를 눌러야 하는지, 비틀어야 하는지, 아니면 당겨야 하는지 순간적으로 당황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세련되고 감각적으로 디자인된 수도꼭지라고 해도 이 경우는 어포던스가 약한 디자인으로 평가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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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인컴퍼니 대표이사 박병천의 말이다. ‘어포던스(affordance)’ 개념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어포던스가 매우 뛰어난 설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포던스는 ‘어떤 형태나 이미지가 행위를 유도하는 힘’ 또는 ‘대상의 어떤 속성이 유기체로 하여금 특정한 행동을 하게끔 유도하거나 특정 행동을 쉽게 하게 하는 성질’을 말한다. 예컨대, 사과의 빨간색은 따 먹고자 하는 행동을 유도하며, 적당한 높이의 받침대는 앉는 행동을 잘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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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포던스는 우리말로 보통 ‘행동유도성’이나 ‘행위지원성’으로 번역되지만, 외래어로 쓰는 경우가 더 많아 여기선 어포던스로 부르기로 하자. 어포던스의 뿌리 말인 어포드(afford)는 원래 ‘~할 여유가 있다, ~해도 된다, ~을 공급하다, 산출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으나, 인간 컴퓨터 상호작용, 인지 심리학, 산업 디자인, 인터랙션 디자인, 환경 심리학, 인공지능학 등의 분야에서는 ‘서로 다른 개념을 연결하는 것’이란 뜻으로 쓰인다.

어포던스는 미국 심리학자 제임스 깁슨(James J. Gibson, 1904~1979)이 1977년에 발표한 「어포던스 이론(The Theory of Affordances)」이라는 논문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로 그의 저서 『시각적 인지에 대한 생태환경적 접근(The Ecological Approach to Visual Perception)』(1979)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깁슨은 어포던스라는 개념을 세상과 행위자(사람이나 동물) 사이에서 실행할 수 있는 속성이나 관계를 가리키는 말로 썼지만, 미국 인지과학자 도널드 노먼(Donald A. Norman, 1935~)은 『디자인과 인간심리(The Psychology of Everyday Things)』(1988)에서 이 개념을 인간과 컴퓨터 상호작용 분야의 관점에서 사용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노먼이 말하는 어포던스의 개념은 ‘지각(知覺) 어포던스(perceived affordance)’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노먼은 “디자이너는 눈에 보이는 조형이나 그래픽 요소를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포던스를 디자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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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컴퓨터 및 소프트웨어 조작 방식’으로 알려져 있는 ‘인터페이스(interface)’는 ‘어포던스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3 즉, 인터페이스는 서로 다른 두 물체 사이에서 상호 간 대화하는 방법을 의미하는 커뮤니케이션인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인터페이스에 관한 이야기들을 몇 개 살펴보자. “요번에 새로 구입한 워드프로세서는 굉장히 쓰기 어려워.” “하루 종일 모니터를 보면서 일을 했더니, 눈이 가물가물해.” “실수로 지우기를 잘못 눌러, 하루 종일 입력한 데이터가 다 날라갔어.” “아무리 컴퓨터 책을 읽어봐도, 이 프로그램은 잘 못쓰겠어.” “매뉴얼을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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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은영은 “예를 들어, 문고리를 보면 ‘저 고리를 돌리면 문이 열리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때 그 문고리는 우리에게 ‘나를 돌리세요’라고 말해주는 셈이다. 즉, 그 대상을 어떻게 사용해야 사람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특성을 그 대상 자체가 지니고 있는 것이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근에 발명되어 나오는 최신 휴대폰들은 일일이 설명서를 보지 않아도 어떤 키를 누르면 어떤 기능을 얻어낼 수 있을지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구세대 성인들에 비해 신세대 청소년들이 이런 디지털 기기의 사용법을 더 즉각적으로 알아차릴 때가 많다. 그 이유는 태어나자마자 디지털 기계들과 함께 살아온 청소년들이 성인에 비해 생태학적으로 그만큼 더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금까지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오며 ‘저것은 먹어도 되겠구나’ 또는 ‘저것은 위험하겠구나’라고 거의 즉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던 것도 자연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자연환경 속의 대상들이 ‘어포던스’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5

​수도꼭지를 눌러야 하는지 비틀어야 하는지 아니면 당겨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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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웰먼(Barry Wellman)은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를 위한 인터넷의 사회적 어포던스(The Social Affordances of the Internet for Networked Individualism)」(2003)라는 논문에서 테크놀로지 어포던스를 사회학적으로 다루었다. 즉, 테크놀로지가 가지는 ‘정치사회적 속성’을 연구하자는 것이다. 해럴드 이니스(Harold Innis)의 ‘커뮤니케이션의 편향(bias communication)’ 개념은 어포던스 개념의 초기 버전이며, “코드가 곧 법이다(code is law)”라는 로런스 레시그(Lawrence Lessig)의 주장은 어포던스의 최근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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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새로운 미디어를 볼 때 “이걸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 묻는다면, 이것이 그 미디어의 어포던스를 의미하는 것이다.7 예컨대, 휴대전화는 이동 중인 사람들에게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어포던스를 유발하며, 이것이 갖는 정치사회적 의미는 매우 크다.8 미디어가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정치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는 어포던스를 ‘사회적 어포던스(social affordance)’라고 한다. 트위터를 보자. 하워드 라인골드(Howard Rheingold)는 “트위터는 한정된 글자 수 안에서 텍스트를 입력하는 빈 상자와 같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트위터에서의 어포던스는 사용자의 트위터 활용을 제한하거나 북돋울 수도 있다. 트위터 사용자는 원한다면 누구든 팔로우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팔로우할 수 있다. 팔로잉은 비대칭적이다. 사용자는 원치 않는 사람의 팔로잉을 차단할 수 있다. 누구의 팔로워든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이 모두가 사회적 어포던스를 의미한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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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포던스 개념은 그 밖에도 다양한 분야에 응용될 수 있다. 우선 광고를 보자. 정승호는 “한국 기업들도 휴대폰, 자동차 등에서 어포던스를 통해 사랑받는 브랜드가 되는 전략을 성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며 “(광고) 스토리를 만들 때 중요한 것은 제품의 기능이 아니고 고객의 관점에서 제품을 사용하는 경험을 통해 느끼고 싶은 환상(fantasy)이다”고 말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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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중에는 광고 자체나 광고에 출연한 모델만 유명하게 만들고 판매는 부진했던 사례가 많다. 박병천은 “디자인이나 광고는 감상용으로 만들어지는 것들이 아니다.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기업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소비자가 행동하도록 유도하지 못한다면 존재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디자인이나 광고는 늘 어포던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떻게 디자인하면 또는 어떻게 광고를 만들면 어포던스를 더 강하게 만들 수 있을까’의 관점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포던스의 강약 정도가 디자인과 광고의 우수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돼야 한다. 고객이 기업의 의도대로 느끼고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힘, 즉 어포던스가 강한 브랜드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의도’를 명확화하는 일이다. 고객들이 어떤 욕구를 느끼도록 할 것인지, 어떤 행동을 하도록 유도할 것인지 그 의도를 분명히 설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연설이든 광고든 브랜드든 어포던스보다 박수 받는 일에 더 유혹을 느끼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진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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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포던스는 자기계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주변 환경을 조성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양정훈은 “어떤 사람이 지적 성장을 목표로 정한 후 가장 먼저 큰 책장을 샀다. 덩그러니 비어 있는 흰 책장을 보면서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겠는가? 책을 사서 채우고 싶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점점 집에 책이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 환경이 조성됐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부를 하려면 도서관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조용한 실내, 적당한 온도, 책의 고유한 냄새, 책장 넘기는 소리, 특유의 긴장감과 함께 각각의 학문에 몰두하는 사람. 이것이 도서관 환경이다. 집중하고 작업하는 데 도서관만 한 장소가 없다.……어떤 환경에서도 능히 자신의 일을 방해받지 않고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환경을 먼저 바꿔보는 게 어떨까? 능률이 오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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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래는 정부의 정책도 어포던스 개념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어포던스는 인간을 ‘몸 전체로 사회를 담고 있는 복잡계’로 본다. 인간 행동은 비합리적이지도 않지만 전적으로 합리적이지도 않다”며 이렇게 말한다. “복잡계의 어포던스에 따르면 인간은 합리적 계산이 내린 판단만이 아니라, 과거부터 축적돼온 전통과 관행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한다. 이 점에 착안해 정치는 국민 모두가 자조의 정신을 갖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 국민이 솔선해 자조 정신을 갖도록 ‘저녁이 있는 삶’보다는 ‘아침이 있는 삶’을 권장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을 질 테니 표를 달라고 구걸하는 정치인들의 행태는 국민에게 장밋빛 환상을 내세우며 자조 정신을 버리고 쇠락(衰落)의 길로 가라고 내모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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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2012년에 나온 주장이라는 걸 감안해야 할 것 같다. 지난 몇 년 사이에 한국인들의 과로(過勞)와 살인적인 경쟁은 더욱 악화되었고, 급기야 “왜 사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정도로 행복감이 바닥으로 떨어졌으니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정치적 어포던스가 필요하다면, 그건 ‘자조’라기보다는 배려, 공감, 연대, 협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어포던스가 아닐까? 이런 의문을 크고 작은 제도적 장치로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사실 어포던스는 이른바 ‘넛지(nudge)’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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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극단적인 정치혐오도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유권자의 광범위한 정치참여를 진작시키기 위해 그런 행동을 유도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 구축엔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 정치에 대해 일방적으로 도덕과 당위 일변도로 비판과 비난만 하고 있다. 즉, 정치혐오에 모든 열정을 쏟는 셈이다.

언론과 지식인에겐 정치비판이 좋은 상품이 되는 반면, 참여를 진작시키기 위한 담론은 상품화가 어렵다. 비당파적인 참여를 부르짖어 이름을 얻은 논객을 본 적이 있는가? ‘독설의 상품화’로 인기를 얻은 논객은 많아도 그런 논객은 전무하다. 즉, 비판의 어포던스는 지나치게 발달한 반면, 참여를 위한 어포던스는 사실상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권자가 참여를 거부하면서 기껏해야 야유나 퍼붓는 구경꾼으로만 머무르는 ‘구경꾼 민주주의(spectator democracy)’는 곧 사회적 어포던스의 문제이기도 하다.(각 문항 후반의 일렬번호 : 참고문헌  인물과사상11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