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세상에 나올 수 있던 비밀의 집. 너무나 소중해서 남에게는 쉽사리 보이고 싶지 않던 공간. 바로 단발머리에 큰 안경을 쓰고 발랄한 웃음을 띤 얼굴로 파리 패션계를 주름잡은 디자이너 다카다 겐조Kenzo Takada의 집이다. 겐조라고? 그렇다. 겐조라는 이름은 익숙할 것이다. 패션부터 메종, 향수에 이르기까지 겐조 제국을 세워 패션계를 뒤흔든 디자이너 겐조. 생전의 그가 가장 사랑한 공간은 ‘파리 속 작은 일본’이었다.

겐조의 집은 파리 동쪽 중심지 바스티유 광장, 인스타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최신 레스토랑과 젊은이로 가득한 바의 테라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보수성이 강한 파리 상류층의 거주지 대신 젊음과 자유의 상징인 바스티유 지역을 점찍은 것은 평생 일본 출신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프랑스 패션 무대에 풀어낸 디자이너에게는 당연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전통 주택의 서까래처럼 늘어선 삼나무 패널 덕분에 산장처럼 보이는 거실은 세로로 길다. 이 삼나무 패널은 1층부터 2층까지 이 집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집에 서정성을 불어넣는다.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이 패널은 일본 장인들이 전통 방식으로 다듬은 것으로, 전통 가구에서 많이 쓰이는 물결 무늬 장식이 들어 있어 해가 들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 거실을 위해 구마 겐고가 디자인한 테이블 위에는 스페인 디자이너 하이메 아욘Jaime Hayon의 이케바나 꽃병을 두었다. 

1993년 7년간의 공사 끝에 바스티유 집에 정착한 이래 겐조에게 이 곳은 은밀한 피신처이자 안식처였다. 그래서였을까? 보통의 경우 디자이너는 홍보를 위해 자신의 집을 외부에 공개하기 마련인데, 겐조는 극구 사양한 것으로 유명하다. 2018년 프랑스에서도 널리 알려진 일본 건축가 구마 겐고Kengo Kuma가 레노베이션을 맡으며 다시 한번 뜨거운 관심을 받았을 때조차 일부만 공개하는 데 그쳤다. 그래서 2020년 겐조가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집은 겐조와 가까운 몇몇 패션계 지인 사이에서 전설로만 남아 있었다.

겐조의 집이 전설이 된 데는 이 집이 외부에서는 전혀 존재 자체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집은 18세기 주택 안에 중정이 자리 잡은 구조로 바깥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겐조의 집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사찰로 향하는 통로처럼 긴 입구를 지나야 한다. 일본 떡갈나무를 하나하나 다듬어 장인의 솜씨로 겹쳐놓은 통로를 만들어낸 건축가 구마 겐고는 여느 집과는 다른 특이한 입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공간에 이르는가 하는 문제는 저에게 언제나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떻게’가 공간에 들어가는 사람의 생각과 인상을 완전히 바꿔놓기 때문이죠. 마치 신전에 들어가는 것처럼 길고 막혀 있는 통로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빛이 나오죠.”

히노키 욕조에 앉으면 창밖의 대나무가 보인다. 생활의 운치가 느껴지는 욕실 바닥에는 검회색 타일을 사용했는데, 구마 겐고에 따르면 돌 징검다리를 형상화했다고.

밝은 떡갈나무 사이로 비치는 빛이 마치 울창한 숲속을 걸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통로는 어쩌면 1964년 다른 세상 파리를 향해 도쿄를 떠난 겐조의 여정이 아닐까. 그해 스물여섯 살의 겐조는 배를 타고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꿈에 부풀어 있던 청년 겐조의 가방에는 분카 복장 학원의 졸업장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파리 패션계는 이제 막 의상 학교를 졸업한 외국인에게 결코 녹록지 않았다. 그 시절 겐조는 파리 거리를 정처 없이 걸으며 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들은 아직도 겐조의 집에 걸려 있다. 패션계에 자리 잡기 위해 청년 겐조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페로Ferraud나 자크 드라에Jacques Delahaye 등 프랑스 브랜드에 의상 스케치를 팔아 생활하면서 파리 패션계에 뿌리내리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도도한 프랑스 패션계 인사 사이에서 겐조라는 이름이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 그해 겐조는 파리에서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다. 파리의 원단 시장인 몽마르트르의 생피에르에서 구한 원단을 겹겹이 붙여 만든 그의 첫 컬렉션은 유럽 패션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몸을 옥죄지 않는 자유로운 형태를 실험해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유럽에서는 보지 못한 이 실루엣은 기모노를 만드는 테크닉에서 비롯되었다”라고 말한 겐조는 이후에도 슬라브 민속 의상, 아프리카 의상 등 파리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이민자의 패션에 일본적 테크닉과 실루엣, 색채를 더한 컬렉션 덕택에 곧 유명 디자이너로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디자이너 야나기 소리Sori Yanagi의 부에리 의자가 시선을 사로잡는 메인 거실. 건축가 구마 겐고가 도코노마에 달린 선반 형태에서 영감을 받은 계단은 ‘천 겹의 종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일본 수공예와 전통 건축을 한자리에 표현한 적이 거의 없음에도 겐조의 집은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졌는데, 아마 통로를 지나면 다다르는 정원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 광경에 놀라지 않기란 쉽지 않다. 파리에서 단숨에 교토의 어느 전통 주택으로 점프한 기분일 테니. 보기 드물다는 니시키 잉어가 노니는 작은 연못과 폭포, 이끼가 자라는 돌, 심어 가꾼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자라난 듯한 벚꽃나무, 특별히 일본에서 가져와 심고 가꿨다는 자두색 잎 단풍나무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볼 수 있는 차실. 문득 겐조의 아버지가 미치야라는 히메지 전통 다실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서일까? 차실은 볏짚 다다미부터 바깥으로 난 고아한 마루와 부러 나구리라는 일본 전통 조각도의 흔적을 내 깎은 문, 쇼지라는 장지문까지 일본 수공예의 전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파리 속 일본이라는 콘셉트는 차실 맞은편에 조용히 자리 잡은 1280㎡에 달하는 4층 집에서도 느낄 수 있다. 언뜻 보면 현대적 공간 같지만 들어서는 순간 곳곳에서 일본 수공예와 전통 건축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정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2층의 테라스는 구마 겐고가 특별히 신경 쓴 공간이다. 바닥과 바깥 덧창 전체는 하나하나 손으로 깎은 밝은 떡갈나무를 깔았다.

겐조는 프랑스 디자이너 피에르 폴랭Pierre Paulin의 팬이던 것으로 전해진다. 폴랭의 작품 중 오더메이드로만 제작하는 소파 시리즈 뒨이 놓여 있다.

“하나하나를 음표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정하게 깎은 나무들이 무한히 반복되는 음표가 되어 전체가 하나의 음악이 되는 거죠.”

구마 겐고의 말처럼 음표가 된 바닥재의 음악은 외부와 내부의 경계선으로, 일본 전통 가옥 특유의 복도인 엔가와식 통로와 지가이다나(귀물을 보관하는 장소인 도코노마의 선반)에서 영감을 받은 아름다운 계단으로 울려 퍼진다. 과연 일본의 건축과 공예에 관한 명저로 손꼽히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그늘에 대하여>에서 영감을 받아 이 집을 레노베이션했다는 구마 겐고의 고백 그대로다.

그 누구보다 파리지앵다운 파리지앵이었지만 동시에 겐조는 그가 떠나온 나라 일본을 잊지 않았다. 매일이 바쁜 유명 디자이너에게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갈 수 있는 파리 속의 고향이란 얼마나 고마운 존재였을까.

다도 선생님이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듯 겐조는 파리 바스티유 한가운데에 교토의 일본 다실을 재현해놓았다.

다도 선생님이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듯 겐조는 파리 바스티유 한가운데에 교토의 일본 다실을 재현해놓았다. 현재 겐조의 집은 고급 주택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크리스티 인터내셔널 리얼 에스테이트 Chrisite’s International Real Estate에 매물로 올라온 상태다. 가격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너끈히 열한 자리를 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다. 특히 건축물을 전문으로 컬렉션하는 건축 컬렉터 사이에서 겐조의 집은 다시 볼 수 없는 매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누가 새 주인이 되더라도 이 공간에 배어 있는 겐조의 향기는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1993년 LVMH가 브랜드 겐조를 사들인 이후 안토니오 마라스Antonio Marras, 펠리페 올리베이라Felipe Oliveira 등 유럽 출신 디자이너들이 겐조를 대신해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맡았지만 브랜드 겐조만의 정체성은 굳건했듯이. 양쪽으로 열린 통창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마치 겐조의 웃음소리 같은 이 집의 새 주인은 과연 누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