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대온실 

밤에 궁궐을 거닐어본다. 일몰을 지나면서 어둠이 내려앉은 궁궐은 낮과는 다른 얼굴이다. 공간이 더 깊고 넓어진 것은 단지 느낌일까? 많은 담장의 모서리에서 묘한 존재들이 불쑥 나타날 것만 같다. 낮 동안 역동적이고 쓸쓸한 역사의 현장이 밤엔 환상과 모험의 장소로 얼굴을 바꾼다. 낮엔 역사가의 시간이, 밤엔 소설가의 시간이 궁궐에 흐른다. 

창덕궁이나 경복궁이 제한적으로 야간 개장을 하는 반면 창경궁은 언제든 야간관람이 가능하다. 겨울철을 제외하면 대온실의 내부까지 마음껏 드나들 수 있다. 봄꽃이 서서히 물들 시점부터 한여름까지 창경궁은 밤나들이를 즐기는 이들로 붐빈다. 이들은 낡은 전각과 깊은 그림자를 떨구는 꽃나무가 있을 뿐인 단순한 어둠을 즐기러 온다. 담장 바깥엔 소란스러운 서울의 일상이 펼쳐지는데, 담장 하나가 이렇듯 다른 세상을 만든다. 

사위가 어두워져 길조차 희미해질 즈음, 청사초롱이 눈에 들어온다. 푸른 비단으로 감싼 여릿한 등불을 따라 밤의 산책자들은 달빛이 비추는 연못 춘당지(春塘池)와 그 너머에 자리한 대온실로 향한다. 황홀한 빛을 머금은 유리 등 사이로 식물들의 그림자가 너울거리고, 대온실 안팎에서 무리지어 다니는 사람들이 춤을 추는 것처럼 아른거린다. 촉촉한 열기를 내뿜는 식물들 사이로 가만히 거닐어본다. 꽤 오랜만에 방문한 터라 식물 구성이 이전과 다르다고 느꼈다. 그땐 전통 꽃나무가 화분 위주로 놓였는데, 지금은 이끼 정원에서 키 높은 아열대식물까지 훨씬 다채롭고 생동감 있게 식물생태계를 꾸렸다. 온실 뒤로도 목재로 된 부속건물들이 자리했다. 겉으론 보이지 않지만 많은 정원사들이 창경궁의 꽃나무들과 온실을 가꾸고 있을 것이다. 

밤의 대온실이 환등기 속 이미지처럼 황홀하다면 낮의 대온실은 건축물의 정교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뼈대는 철골, 테두리는 목재로 새하얗게 세우고, 투명한 부분엔 모두 맑은 유리창을 끼웠다. 유럽풍 건축물을 모방한 온실로 21세기 사람들에겐 자그마한 보석상자처럼 보이겠지만, 대온실이 지어진 1909년엔 최첨단 기술을 장착한 가장 거대한 유리건축이었다. 지붕 끝은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 무늬로 각을 세워 왕실의 자산임을 강조했다. 회양목 일속이 기하학적 무늬를 이루는 온실 앞 자수정원과 찰찰하게 물을 뿜는 중앙의 작은 분수가 분위기를 더한다. 

한낮의 햇살 아래서도 대온실은 청량하게 빛난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레이스처럼 그늘을 만든 현관을 통과해 실내로 들어가면, 새하얀 차양 속에 성큼 내려앉은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 온실 안은 약간 낮은 중앙부를 약간 높은 복도가 둘러싸고 있다. 중앙부의 가장자리엔 수로가 흐르고, 원형의 대형 수공간과 나무가 식재된 부분 사이에 벤치도 놓여있다. 복도를 따라 한 바퀴 걷다 보면 창가를 둘러싼 식물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창문은 물론, 천장 위의 유리문도 열리고 닫히며 환기를 돕는다. 낡은 부분을 보수했다고 해도 건물에 담긴 100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다. 오히려 녹이 슬고 나뭇결이 드러난 그곳에 옛 건물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우리 전통 속에도 작물의 생장을 위한 실용적 용도로 지어진 온실이 있었다. 하지만 창경궁 대온실은 조선의 운명이 기울어진 시점에 일제의 기획 하에 다른 용도로 지어진 곳이다.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제는 고종의 퇴위를 강요했고 왕위를 이어받은 순종은 창덕궁에서 유폐되듯이 살았다. 일제에 의해 궁궐의 규모는 축소되고 전각들은 헐려 나갔다. 그중 가장 많이 훼손된 곳이 바로 창경궁이었다. 옛 시절 임금 앞에서 과거를 보던 너른 마당이 있던 곳은 박물관, 식물원, 동물원이 있는 공원이 되었다. 심신이 약한 국왕의 마음을 달래준다는 구실로 인공 연못인 춘당지가 조성되고, 그 주변에 일본식 정자와 프랑스식 자수정원이 있는 대온실이 들어섰다. 

지금은 춘당지도 우리식 연못으로 바뀌고 일본식 정자도 사라졌다. 대온실은 대한제국기에 설치된 유일한 근대 온실건축으로서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대온실이 근대건축으로서 새로운 의미와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은 역사성에 집중해서 대온실을 보았다면 앞으로는 공백으로 남아있는 근대정원문화와 식물문화를 밝히는 장소로 달리 보았으면 한다. ‘그땐 어떤 식물들이 연구되었을까? 집과 정원은 어떻게 꾸몄을까?’ 하는 질문에 답을 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문화재청 자료 중 《창덕궁 사진첩》이라는 도록에는 대온실 사진이 여러 점 실려 있다. 그리고 거기엔 두 남자의 사진이 실려있다. 대온실의 정원사들이다. 이들은 대온실에서 화초를 가꾸고 원예실험장에서 재배에 힘썼을 것이다. 나는 이들 중 한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대온실을 드나들며 식물을 바라보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에 서늘한 밤 바람이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