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 의지하기엔 못미더운 퇴직연금

 


100세 시대가 축복이 아닌 재앙이 될 수 있다. 은퇴 준비가 탄탄하지 못하다면이란 조건이 붙지만.

불행히도 한국인의 노후 대비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 최근 삼성생명 은퇴연구소가 발표한 종합은퇴지수는 100점 만점에 56점이었다. 재무, 건강, 활동 등 노후와 관련한 전반적인 부분이 낮았지만 특히 재무 점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한국인의 은퇴 준비에 빨간불이 켜졌는데도 노후 대비의 3대 축 중 하나인 퇴직연금은 걱정스러운 수준이다. 지난해 주요 퇴직연금 수익률은 3%대로, 각종 수수료를 빼면 실질 수익률은 연 1~2%대다. 1.3%였던 지난해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돈이 전혀 불어나지 않은 셈이다. 퇴직연금의 대체재라 할 수 있는 국민연금이 4.2%를 기록한 것과 대조적이다. 원금 보장에만 신경 쓴 느긋한(?) 운용에 ‘퇴직연금 = 노후 안전판’이라는 타이틀을 떼어 버려야 할 처지다.

정부가 뒤늦게나마 퇴직연금을 공격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줬으나, 더 속 시원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공격적 운용 없인 노후자금 그림의 떡

2040년 3명 중 1명 65세…노인 빈곤율도 OECD 국가 평균 3배 넘어

쥐꼬리 국민연금에 퇴직연금도 불안…투자 제한 풀되 안전판 마련 과제


정부가 올해 10년 차를 맞는 퇴직연금제도에 칼을 댄다. 노후 안전판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는 판단에서다. 일단 긍정적인 평가가 주류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 또한 적지 않다는 의견도 많다.

퇴직연금 종합대책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가입 대상을 ‘강제로’ 넓힌다. 300인 이상 사업장은 2016년부터 가입을 의무화한다. 2018년 100인 이상, 2020년 30인 이상 기업이 의무가입해야 한다. 대기업 도입률은 91%에 달하는 반면, 영세사업장과 중소기업은 14~15%에 머물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 조치다. 의무가입을 확대해 영세·중소기업 근로자의 노후를 챙기겠다는 의도가 담겼다.

둘째, 위험자산 투자의 물꼬를 텄다. 근로자가 가입할 수 있는 퇴직연금은 확정급여형(DB) 아니면 확정기여형(DC)이다. DB형은 퇴직 시 수령하게 될 수급액이 사전에 확정된다. DC형은 근로자 책임 아래 운용해 수급액이 결정된다. 지금까지 DB형은 위험자산을 70%까지 보유할 수 있었고 DC형은 40%로 제한됐다. DB형은 기업이 무조건 원금을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위험자산에 투자해 손실이 나도 근로자가 부담을 질 일은 없다. 반면 DC형은 과도하게 원금이 깨질 경우 근로자 수령액이 줄어 노후가 불안해진다는 판단에 따라 위험자산 투자 범위를 좁혔다.

정부는 앞으로 DC형의 위험 보유 제한 비율을 DB형과 동일하게 70%로 높일 예정이다. 이렇게 하면 운용사가 지금처럼 저위험·저수익이 아닌 중위험·중수익 전략을 쓰도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DC형을 선택한 근로자는 스스로 운용해 높은 수익을 낼 자신이 있는 경우라고 볼 수 있는데, 지나치게 엄격한 규제를 하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완화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금융사 자산 운용 능력에 따라 손해가 발생할 수 있는데도 정부가 제도를 바꾼 이유는 대한민국의 고령화 속도는 빠른데 퇴직연금 수익률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65세 인구 비율은 2018년 14%에서 2040년 32%로 늘어난다. 국민 3명 중 1명이 65세 이상 노인이 되는 셈이다. 노인빈곤율이 높다는 점도 문제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따르면 2009년 기준 한국 노인빈곤율은 45%다. OECD 평균(13%)은 물론, 미국(24%), 일본(22%), 호주(27%)의 2배에 달한다. 반면 노후 보장을 도와줘야 할 공적연금은 노후 소득을 대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40년 가입을 기준으로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은 2008년 50%에 그쳤고, 이마저 2028년이면 40%대로 내려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직장을 수십 년 다닌 뒤 은퇴한다 해도 퇴직연금에 의존할 상황이 못 된다. 금융권에 따르면 DB형 기준 20개 금융사의 2분기 운용 수익률은 0.73~0.93%로 0%대였다. 지난해 주요 금융회사의 퇴직연금 수익률은 연 2.8%에 머무른다. 김영도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자금 운용을 위해 금융회사에 지불하는 수수료를 빼고 나면 실질 수익률은 연 1~2%에 불과하고, 지난해 물가상승률 1.3%를 감안하면 은행의 정기예금이나 국채 수익률에도 못 미친다”고 꼬집었다.

이렇게 수익률이 떨어진 가장 큰 이유는 지나치게 안전 위주로 운용됐기 때문이다. DB형은 전체 퇴직금의 70%가량을 차지하는데 저위험·저수익의 원리금보장형 상품 비중이 97%나 된다. 회사가 구태여 퇴직연금에서 수익률을 높이려 하지 않는 탓이다. 근로자가 적극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DC형도 원리금보장형 상품이 79%다. 40% 이상 위험자산에 투자하지 못한다는 규제와 함께 근로자 역시 안전에만 치중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2008년 금융위기 때 일부 펀드 수익률이 반 토막 나는 걸 본 투자자들이 보수적으로 돌아선 면이 있다”며 “그러나 정기예금만도 못한 퇴직연금 수익률로 노후를 대비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제한 풀면 더 불안해진다는 일부 의견

위험감독·수급권보장 등 장치 필요


일부에선 위험자산 투자 제한을 풀어놓으면 퇴직연금이 더 불안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규제 완화는 기본적으로 맞는 방향이나 보완장치가 없으면 근로자의 노후생활이 더욱 위협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주로 드는 사례가 2012년 일본 대형 기업연금운용회사 AIJ투자자문이다. 이 회사는 최대 240%의 고수익을 보장하겠다는 허위광고로 2000억엔(약 2조원)에 이르는 자금을 끌어들이고 부실하게 운용해 상당한 돈을 날렸다. 이런 부정적인 사례에도 불구하고 많은 전문가들은 규제 완화라는 큰 틀은 유지하되 다양한 상품 구성, 투명한 사업자 선정, 수탁자 책임 강화, 수급권 보호장치 등의 보완책으로 부작용을 최소화하라고 입을 모은다.

미국의 타깃데이트펀드(Target Date Fund)가 좋은 벤치마크 사례다. 미국인들이 퇴직연금을 운용할 때 가입하는 대표펀드로 미국 근로자의 70%가 여기에 가입했다. 이 펀드는 근로자 은퇴 날짜에 맞춰 운용하는데, 20~30대 때는 주식 등으로 고수익을 추구한다. 젊은 나이 때는 수익률에 실패를 봐도 만회할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40대 이후로 접어들면 채권 등 안전자산 투자 비중을 늘린다. 이 펀드에 가입한 미국 근로자의 연평균 수익률은 6%대다.

연금 계좌를 관리하는 사업자 선정도 더 투명해야 한다. 현재 은행·보험사 등 54개 금융사가 경쟁하고 각 기업은 54개 가운데 한 곳 또는 복수의 사업자를 선정한다. 그러나 국내에선 재벌 계열사나 대출로 엮인 대형 은행에 몰아주는 현상이 심각하다.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 시장 상위 6개 사의 점유율은 53%다. 해당 6개 사는 재벌 그룹에 소속된 삼성생명·HMC투자증권과 기업대출을 하는 국민, 신한, 우리, 기업 등 대형 은행이다. 알음알음 선정하다 보니 ‘특별한’ 관리를 기대하기 어렵다.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퇴직연금 종류는 400여종이지만 각 사업자가 제공하는 퇴직연금 운용 상품은 10개 내외다. 또 운용사들은 퇴직연금 전용 펀드를 만들지 않고 기존 펀드와 똑같은 펀드를 만든 뒤 이름만 ‘퇴직’을 붙여 판매한다. 이렇게 퇴직연금 상품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다 보니 손쉽게 원리금보장형으로 돈을 ‘방치’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류건식 보험연구원 고령화연구실장은 “규제를 풀어주더라도 수탁자가 이익 추구보다 신의성실 원칙에 따라 상품을 권유하도록 책임 관련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며 “손실이 나더라도 수급권을 보호할 수 있는 보험성 장치를 만들어 두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산 운용 규제가 완화되면 퇴직연금 제도와 자본 시장이 함께 발전해 근로자에게 이득이 될 가능성이 크다. 금융권이 최소 수익률을 보장하는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상품을 개발해 자연스럽게 위험장치가 마련될 것이다.”

성주호 경희대 경영학과 교수 얘기도 비슷한 내용이다.

퇴직연금 궁금증

Q.퇴직연금제도에선 일시금 수령이나 중간 정산을 못 받는 건가?

A. 퇴직 사유 발생 시 일시금 수령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이자소득세(15.4%) 면제 등 각종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돼 총 수령액은 줄어들 수 있다. 안정적인 노후 소득 보장을 위해 가능한 한 연금으로 수령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다. 다만 주택 구입이나 자녀 교육, 결혼 등을 이유로 목돈을 써야 하는 경우엔 세제상 불이익 없이 일시금을 받을 수 있다. 중간 정산은 원칙적으로 불가하며 주택 구입이나 장기 요양, 개인 파산, 천재지변 등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된다.

퇴직연금 궁금증

Q.퇴직연금사업자 등 금융기관이 파산하면 내 퇴직연금을 못 받게 되는 것 아닌가?

A. 현재 퇴직연금은 예금, 적금 등 다른 금융 상품의 잔액 규모와 합산해 5000만원까지만 보호(지급보증)돼 수급권 보호가 부족한 상황이다. 때문에 정부는 퇴직연금 수급권 강화를 목적으로 예금자보호법 시행령을 개정, 다른 금융 상품과 구분해 퇴직연금만 별도로 개인당 5000만원까지 예금 보호 한도를 적용할 예정이다. 현재 1인당 퇴직연금 평균 적립액은 1500만원 수준이다. 퇴직연금은 장기 가입 성격상 추후에는 예금 보호 한도를 5000만원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다.

[출처] 매경 이코노미 Econo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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