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의 숲을 거닐다] 휴식과 아름다움 속으로 / 김내리, 미술칼럼니스트

명화의 숲을 거닐다-8회

휴식과 아름다움 속으로

김내리, I.ART.U 대표, 미술칼럼니스트

지난여름은 참으로 무더웠습니다. 말 그대로 태양이 타올라, 그림 속 여인의 옷 색깔처럼 공기가 붉은빛을 띠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일상을 영위하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무더운 여름 잘 보내셨는지요. 낮잠을 자는 여인처럼 휴식도 취하셨는지요.

프레드릭 레이튼(Lord Frederick Leighton 1830~1896)의 작품 <타오르는 6월, Flaming June>은 물결치듯 몸을 감싸는 오렌지빛 시폰 드레스가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촉감이 전해지는 드레스의 주름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반짝이는 지중해의 햇살 아래 긴 머리카락을 풀고, 곤히 잠든 여인의 얼굴이 보입니다. 그녀는 마치 주문에 걸려 하던 일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잠에 빠진 신화 속 님프 같습니다. 대리석 의자에 불편한 자세로 웅크리며 잠들었지만, 고혹적인 자태가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깨워야 할 것 같지만, 저도 잠시 그녀의 발치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하고 싶어집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화가 프레드릭 레이튼은 유복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피렌체와 로마 등지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습니다. 레이튼이 1855년 런던의 로열아카데미에 출품한 작품 <피렌체 시가를 행렬 속에 운반되는 치마부에의 성모상>이 호평을 받고, 이를 빅토리아 여왕이 구입하게 되면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지요. 이후 고대 그리스의 신화를 소재로 다룬 작품을 주로 제작하며 로열 아카데미의 회장직을 맡았고, 1896년에는 화가로서 처음으로 남작 작위를 받아 명성, 지위, 부를 모두 갖추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작위를 받은 다음 날, 협심증으로 사망합니다. 아, 인생이 덧없고, 무상하네요. 독신이었던 레이튼은 재산과 귀족 지위를 물려줄 자식이 없었는데, <타오르는 6월의 모델>로 알려진 도로시 딘과 그의 동생들에게 거액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둘은 어떤 관계였을까요. 모델과 모델의 동생들에게 거액의 유산을 남기다니 말이지요. 당시 레이튼은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도로시 딘과 비밀스러운 관계였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림을 다시 볼게요. 웅크리고 있지만 여성은 이상적인 비례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품 속 여성들은 이처럼 여신 같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데, 레이튼은 이상적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전 유럽을 헤매며 모델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때 발견한 모델이 도로시 딘이었습니다. 보랏빛 눈, 곱슬거리는 금발을 가진 고전적 외모의 도로시는 레이튼의 뮤즈가 되었고, 그녀를 모델로 탐미적인 작품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또한 레이튼은 도로시가 배우로 발돋움하도록 돕고, 그녀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그녀와 동생들을 보살피는 등 도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레이튼은 그녀를 위해 후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며 결혼은 하지 않았기에 비밀스러운 관계라는 소문이 생겼지요. 엘리트 귀족과 평민 신분이라는 차이와 28살의 나이차까지, 그 둘을 가로막는 장벽 때문이라는 짐작도 있지만, 둘의 관계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이후 현대미술의 등장과 함께 빅토리아 시대의 작품은 홀대를 받고, 레이튼의 작품은 잊혔습니다. 하지만 푸에르토리코의 폰세 미술관이 이 작품을 소장하게 되었고, 지금도 우리에게 휴식과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이제 슬슬 그녀의 잠을 깨워볼 시간인 것 같습니다. 아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9월의 살랑거리는 바람이 그녀의 볼을 간지럽힐지도 모르겠습니다. 휴식을 취하고 나니 저도 개운해집니다. 다가오는 가을, 좀 더 활기차게 움직여야겠습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활기찬 9월 맞으시길 바랍니다.

작품1(필수): <타오르는 6월>(1895), 캔버스에 유채, 120.6*120.6cm, 푸에르토리코 폰세미술관,

작품2: <실 감기>(1878), 캔버스에 유채, 100.3*161.3cm,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즈 갤러리

작품3: <음악 수업>(1877), 캔버스에 유채, 93*95cm, 런던 길드홀 아트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