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퍼스트레이디의 품격

구상찬, 前 상하이 총영사·18대 국회의원

만남은 인연이다! 옛말에 옷깃을 스치는 인연도 전생에 억만 겁의 시간 속에 연이 있어야 현세에 옷깃을 스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옷깃을 스치는 찰나의 인연도 빠른 눈을 가지면 그 짧은 시간도 소중한 기억으로 만들 수 있다.

출장길에 우연히 만난 레이건 대통령의 영부인 낸시 레이건. 5분간의 만남에서도 세계 최고 국가의 영부인다운 품격을 보여줬다. 청와대 영부인의 옷값이 얼마고, 옷이 몇 벌이더라는 언론의 경쟁 보도와 여·야 정치권의 품격 없는 옷값 공방에 반팔 티셔츠의 80대 할머니 낸시 레이건 여사가 생각났다. 40여 년간 여의도 정치권으로 출근한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눈이 빠르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 보통 사람은 그냥 보고 지나칠 것도 약간의 의전(儀典) 상식만 있으면 많은 VIP들의 민낯을 볼 수 있다. 

몇 년 전 프랑스 출장길에 만난 다니엘 크레이그. 그는 항공사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엄청난 키의 미인 비서들을 대동하고 항라운지로 들어왔다. 재빠른 눈으로 살펴보니 <007>의 다니엘 크레이그였다. 함께 출장을 간 남경필 의원에게 말하니 “아닌 것 같은데!” 하다가 잠시 후 “와! 007이다!”라고 했다. 보좌관 때다. 중국에서 공산당 간부들과 골프를 치는데 우리 앞 팀이 조금 수상했다. 네 사람이 가는데 한 사람만 골프를 치는 게 아닌가. 그는 나인홀만 치고 샤워도 하지 않고 3명의 건장한 청년들에 둘러싸여 차량을 타고 떠났다. 자오쯔양(趙紫陽) 국가부주석이었다. 당시 그는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가택연금 중이었다. 보통 사람들이었다면 일반적인 골프팀으로 알았을 것이다. 오래전이다. 비 오는 날의 이태원. 어떤 키 큰 여자가 내 우산을 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미안하다며 손을 들었다.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인데 하며 두세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주위 사람들이 그녀를 둘러쌌다. 이윽고 그녀가 그들을 제치고 오더니 재차 미안하다며 손을 잡았다. 세계적인 배우 재클린 비세트였다. 화장 안 한 여배우는 알아보기 힘들다.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낸시 레이건 여사와의 만남이 순간적으로 아무런 연출이 없는 만남이었음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 할머니는 연두색 상의를 손에 들고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인파 속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그 주위로 건장한 체격의 청년들이 이어폰을 끼고 인파 속에 숨어서 그녀를 따라가고 있었다. 많은 관광객과 상인들도 그 할머니가 누구인지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그런데 외국에서 온 촌놈(?) 눈에 확 들어온 것이다. 당연히 누군지 확인에 들어갔다. 낸시 레이건,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영부인이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 다가가 인사했다. “낸시 레이건 여사 아니신지요?” 물으려 하자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Yes I Am”이라고 했다. 나는 한국에서 온 국회의원이며 레이건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했더니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고는 아! 나는 서울에 간 적이 있다. 너무 아름다운 나라였다. 특히 많은 어린이들이 자기 앞에서 노래도 불러줬다고 했다. 또 작고 아름다운 보석 상자를 선물 받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 안에 보석은 없었다며 깔깔 웃었다. 10대 소녀와 같은 웃음과 위트였다. 

그 짧은 만남에서 한·미 관계의 중요성이나 대북 정책에 대해 묻는 건 미친 짓이었다. 그녀는 LA에 공식 행사가 있어서 온 것이냐, 아니면 관광을 온 것이냐, 내게 물었다. 당시 나는 UCLA에 다니던 아들을 보러 왔는데,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나와 버렸다. 중요한 콘퍼런스가 있어서 참석했다고 하자 건강하게 지내다 돌아가라고 했다. 더 말을 이어가려고 하자 황소처럼 생긴 경호원 한 명이 다가오더니 “엑스 큐즈 미”라고 한다. 이제 그만하라는 뜻이다. 

정치인은 사진이 생명이다. 사진 한 장 같이 찍어도 괜찮겠냐고 묻자 “슈어! 와이낫!” 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상의를 입었다. 티셔츠 차림으로 사진을 찍으면 품격이 없어진다고 생각했을까. 그녀는 옷차림도 화장도 3~40대처럼 하고 다녔다. 사진을 찍고는 “한국 국민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가볍게 포옹을 해주고는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골목길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처럼 5분간 보여준 퍼스트레이디의 품격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경이롭게 내 뇌리에 남아있다. 그녀는 2016년, 94세로 타계했고 남편인 로널드 레이건 묘소 옆에 묻혔다. 그녀는 1983년 방한 당시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던 어린이 환자 2명을 미국에 데려가 수술을 시켜줬다. 그리고 1989년 “Just Say No!”라는 슬로건을 걸고 마약 퇴치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UN에서 연설한 최초의 퍼스트레이디였다. 그녀는 레이건 대통령이 병색 짙고 초췌한 모습으로 고생하자 10년간 어떤 언론에도 대통령을 노출시키지 않아 전직 대통령의 위엄을 지켰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낸시 레이건 여사의 안부를 국민들에게 전한다.  

“코로나 사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 국민 여러분, 잘 지내고 계시나요?”(낸시 레이건) 

*1957년 부산 출생. 동국대학교 체육교육학 학사 및 동대학원 석사. 주상하이대한민국총영사관 총영사, 18대 국회의원,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등 역임. 

사진: 낸시 레이건 여사와 함께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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