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산업대첩 - ①총론

한국, 승승장구하는 동안 일본 추락…
반도체·전자·조선·철강 등 추월
 
한때 ‘일제’라고 하면 인정받고, 한국 제품은 쳐다보지도 않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위상이 바뀌고 있다. 주력산업 분야에서 우리나라 기업들의 상승세가 뚜렷해지면서 상황이 역전되고 있다.  
  
1990년 일본의 주간 경제지인 <동양경제>는 20년 후 일본 경제가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시만 해도 자신만만한 전망이었다. 하지만 이 전망은 완전히 빗나갔다. 미국 추월은커녕 오히려 중국에 역전을 당한 꼴이다. 국가 신용등급 면에선 한국에도 뒤처졌다.
지난 9월 한국의 신용등급이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추월했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피치가 한국의 신용등급을 ‘AA-’로 한 단계 상향 조정함으로써 일본(A+)을 앞서게 된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신용등급이 역전되긴 했지만 전체 경제규모 면에서는 일본이 우리 경제를 월등히 앞선다. 신용등급은 말 그대로 빚을 갚을 수 있는 상환능력이 더 낫다는 의미일 뿐이다.
지난해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5조8690억달러로 한국(1조1160억달러)의 5배가 넘는다. 1인당 GDP도 한국은 2만1500달러로 일본(4만6000달러)의 절반 수준이다. 외환보유액 역시 일본(1조2728억달러)이 한국(3144억달러)보다 4배나 많다.
우리나라의 주력산업도 원천기술과 핵심부품의 상당 부분을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대일무역수지는 286억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2001년 이후 지난해까지의 누적적자는 2730억달러에 달한다.
하지만 이번 신용등급의 역전처럼 양국 간 격차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이미 일부 산업에선 일본을 따라잡거나 추월한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장기 불황으로 인해 일본 기업이 주춤하는 사이 한국 대표기업들이 매출 성장률에서 일본을 추월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벌 성적 평가 사이트인 CEO스코어가 <포춘>이 선정한 연도별 세계 500대 기업 중 2005년부터 2012년까지 8년간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10대 기업 순위를 유지한 6개의 한국 기업과 일본 7개 기업의 매출 성장률을 조사한 결과 한국 대기업의 평균 매출 성장률이 일본 대기업보다 2.7배나 높았다.
삼성전자·SK이노베이션·현대차·포스코·LG전자·한전 등 6개 기업의 7년간 매출 성장률은 평균 99.85%에 달했다. 각 기업별로 매출이 2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반면 이 기간 동안 도요타, NTT도코모, 히타치, 혼다, 닛폰생명보험, 소니의 매출 성장률은 37.10%에 머물렀다.
삼성전자의 경우 2005년 715억달러였던 매출이 2011년 1489억달러로 2배 이상 증가했다. SK이노베이션도 376억달러에서 1003억달러로 166.3% 늘어났다. 이에 반해 일본 부동의 1위인 도요타자동차의 매출은 2005년 1726억달러에서 2011년 2353억달러로 36.3% 증가하는 데 그쳤다. NTT도코모 역시 1005억달러에서 1330억달러로 32.6% 늘었다.
그러나 매출 규모에서는 한국 기업이 절대적인 열세다. 도요타의 2011년 매출은 2353억달러로 삼성전자의 1489억달러보다 864억달러나 많다. 현대차와는 무려 3배 이상 격차를 보인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맞비교되는 일본 소니는 2011년 매출이 822억달러로 삼성전자의 55% 수준에 불과했다. 소니는 지난 7년간 매출 성장률 면에서도 일본 10대 기업 중 가장 낮은 23.4%를 기록했다.
산업별로 보면 전자·조선업의 경우 한국이 멀찌감치 앞질렀으며, 자동차·철강산업은 백중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 종합상사 부문에선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기 힘들 정도의 격차를 보이고 있다. 
 

자동차·철강산업은 백중세
소니와 파나소닉, 그리고 산요. 세계 시장을 석권하며 아날로그 시대를 이끌었던 일본의 대표적인 전자기업이다. 한국 기업들은 이들로부터 앞선 기술을 배워야 했다. 하지만 이들 일본 기업의 명성이 사라진 지 오래다. 첨단기술의 상징이던 소니는 만성적자로 TV사업을 접는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이며, 산요는 중국의 하이얼그룹으로 넘어갔다. 파나소닉은 부도직전의 위기에 몰렸다.
이에 반해 삼성전자는 D램 반도체 시장에선 1992년 이후 선두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으며, TV시장에서는 2006년 소니를 앞지른 이후 승승장구하고 있다.
한국 조선업은 2000년 들어 일본을 추월한 뒤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19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일본은 세계 조선시장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엔고의 영향으로 가격경쟁력이 급격히 저하되기 시작했으며, 결국 우리나라의 추월을 허용했다. 2000년 이후 한국 조선업은 일본을 제치고 신규수주, 인도량, 수주잔량 등 모든 면에서 세계 조선 강국으로 부상했다.
철강산업은 전체적인 규모 면에선 우리가 뒤지지만, 기업 단위에선 한국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의 철강생산량은 일본의 60% 수준으로 전체 산업 측면에선 상당한 격차를 보인다. 그러나 기업 단위의 경쟁력에선 우리나라의 포스코가 일본 철강기업을 앞선다. 1974년부터 2008년까지의 조강생산 증가율을 살펴보면, 일본 철강기업들이 거의 정체상태인 반면 포스코의 성장률은 15%에 육박한다. 일본 돈(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세워진 포스코가 이제 일본 제철산업을 턱 밑까지 추격한 것이다.
한·일 간 자동차산업의 경쟁 역시 백중지세다. 세계 곳곳에서 한국차와 일본차가 자리 다툼을 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일본 자동차산업의 대표주자인 도요타자동차는 2010년 초 미국에서의 대량 리콜에 이어 지난해 3월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으로 현대차의 추격을 허용했다. 하지만 저력의 도요타다. 도요타는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현대차와 좁혀졌던 격차를 다시 벌리고 있다. 도요타가 1937년 창립 이후 사상 최악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기초기술을 중시하는 일본의 ‘모노즈쿠리(물건 잘 만드는 일)’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력 강한 뿌리산업이 일본 글로벌 경쟁력의 원천이라는 점을 새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 종합상사는 일본 상사 배우기에 여념이 없다. 일본 경제의 주춧돌인 동시에 첨병이었던 종합상사들이 ‘무역’에서 ‘자원개발·투자’로 변모한 것을 벤치마킹하기 위해서다.
일부 주력산업에서 우리나라가 일본을 앞서고 있는 모양새다. 하지만 소재·부품분야는 갈 길이 멀다. 이 분야의 대일무역적자는 매년 200억달러에 육박할 정도로 대일의존도가 심각하다.
차세대 성장동력인 2차전지 시장은 한국과 일본이 양분하고 있다. 삼성SDI와 LG화학이 수십년간 시장을 독점했던 일본 파나소닉과 소니로부터 시장 점유율을 뺏어오는 중이다.
일본의 몰락은 소니가 미국 기업들을 제치고 글로벌 넘버원이 됐던 1992년부터다. 이때부터 시작된 단기 불황과 장기 저성장, 그리고 급변하는 시장 흐름에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 TV산업의 추락은 브라운관에서 PDP, LCD 등 평판TV로 바뀌는 패러다임을 놓친 것이 요인이다.
- 기초기술을 중시하는 것은 일본 산업 경쟁력의 원천이다. 하지만 일본은 내수시장에 집중하면서 경쟁력을 잃은 반면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은 글로벌 시장 공략에 발 빠르게 움직여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사진은 도요타자동차의 조립라인(왼쪽)과 삼성전자가 TV를 글로벌 론칭한 모습.
내수시장 안주·시장 흐름 놓친 일본
이우광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연구위원은 “제품 자체의 경쟁력도 문제지만 시장에서 어필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지 못한 것도 원인”이라며 “이전 제품보다 약간 더 좋은 제품 만들기, 다른 회사보다 조금 더 나은 제품 만들기에만 급급하다 보니 소비자들이 진정으로 즐거워할 제품을 만드는 감각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요즘 일본 전자제품에서는 워크맨처럼 소비자를 감동시키는 놀라운 제품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보다 절대 우위인 첨단 화학소재 산업의 성공은 핵심역량이 되는 기술을 깊게 파고든 노력과 함께 시대의 변화에 맞게 이를 진화시키기 위해 이를 다각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화학산업의 경우 급변하는 IT산업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제품 사이클이 길고 20년, 30년씩 장기 투자를 한 것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한국보다 5배 이상인 일본의 경제 규모도 산업 성장의 발목을 잡았다. 내수시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낀 일본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 공략에는 발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우광 연구위원은 “일본 기업의 기술 수준은 세계 최고지만 국내시장에 집중하다 보니 비즈니스 역량은 한국기업에 비해 떨어진다”고 분석했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도 “장기불황과 저출산, 인구감소 등으로 내수 지향 전략이 어렵게 되고, 신흥시장에서 활로를 찾지 못해 점차 세계 시장에서 위상이 약화됐다”고 말했다.
최근 일본 기업들이 국내시장을 개척한 이후 해외 시장에 진출했던 기존의 패턴을 혁신하고 아예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 공략에 나서는 것도 기존 전략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다. 특히 일본 기업들은 그린에너지 등 차세대 사업의 글로벌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일본이 1970년대 미국을 모방하는 ‘추격자’ 단계를 마치고, 1980년 이후 ‘시장 선도자’로 진화하지 못한 것도 몰락의 요인이다. 혁신을 통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해 몰락을 자초했다는 얘기다.
한국 기업이 일본보다 잘 나가는 것은 전자, 자동차, 철강 등 주요 산업에서의 원가경쟁력과 첨단 기술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한·일 간 경영시스템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 한국 철강산업은 전체 규모 면에서 일본에 뒤지지만 기업 단위에서 보면 포스코가 일본 철강기업보다 우위에 있다. 포스코가 파이넥스 공법으로 철강을 생산하고 있는 모습.
중국의 성장 잠재력에 주목해야
일본 기업의 경영시스템은 현장에서 올라오는 기획이나 방향을 승인하는 패턴이 강했다. 그래서 사업부의 목소리도 상당히 큰 편이다. 그러나 사장을 포함한 최고경영진이 전략방향을 설정해 빠르게 움직이는 데는 약했다. 이러한 경영시스템은 경영환경이 급변하고 회사의 방향을 한꺼번에 혁신해야 할 때에는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우광 연구위원은 “삼성이나 LG 등 한국 대기업들이 오너 경영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라며 “재벌체제는 경영계획을 수립하거나 신속하게 의사 결정을 하는 데 구심점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저출산과 빠른 고령화, 초저금리 시대 진입 등 쇠락기에 접어들 당시의 일본의 모습이 현재 한국 사회와 비슷하다는 점은 부담스러운 부분이다. 한국이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일본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제조·수출 중심의 비중을 낮추고, 내수형 서비스업도 적극적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또 일본 기업이 한국 기업의 낮은 기술력이나 제품 품질을 보고 방심하다 당한 측면이 있다. 우리의 경우도 신흥국 기업, 특히 중국의 성장 잠재력이 점차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지평 연구위원은 “일본 기업의 실패는 성공기업으로서 자기 혁신에 실패한 결과였다”며 “한국 기업도 추격자에서 벗어나 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전략과 기술개발 체제, 조직역량을 고도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사: 장시형 기자 (zang@chosun.com

[출처] 이코노미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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