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네온(bandoneón), 그 이름도 낯선 악기와의 조우는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36)가 들려준 매혹적인 선율에서 비롯되었다. 악기에 대한 이질감이 연주자에 대한 물음표로 이어진 순간이었다. 카이스트를 중퇴하고 일본의 세계적인 반도네온 연주자 료타 코마츠를 사사한 뒤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오르께스타 에스꾸엘라 데 땅고 에밀리오 발카르세(Orquestra Escuela de Tango Emilio Balcarce)에 수석 입학한 이색적인 이력은 제법 드라마틱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녀는 김동률, 이적, 윤상, 정재형, 유희열, 이문세 등 대중 뮤지션들과 송영훈을 비롯한 많은 클래식 뮤지션들과의 협연, 그리고 예술 프로젝트 <서커스 워치 마이 쇼>(2012)의 음악감독 등, 다채로운 활동으로 음악의 외연과 내연을 확장해왔다. 앞으로 써 내려갈 생생한 스토리와 촘촘한 플롯을 기대하며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서 그녀를 만나보았다. <바이올린 가이즈 WITH 고상지> 공연을 앞둔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이번 공연에서는 연주도 잘하시고 인기도 많으신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김, 필립 포가디, 그리고 피아니스트 이현진 씨와 함께해요. 이현진 씨는 얼마 전 다른 공연에서 콰르텟 멤버로 참여해 하프시코드(Harpsichord)로 연주했는데, 너무 잘 맞고 좋았어요. 그동안 클래식과의 협연은 많이 했지만, 이번 공연만의 특징이라면 솔리스트가 두 명이라는 거예요. 저는 2부 탱고 파트에 출연하는데, 영화 <여인의 향기>의 <Por Una Cabeza>와 피아졸라의 <Adios Nonino><Libertango> 등 8곡을 연주할 예정이에요. 현재 두 바이올린이 돋보이도록 편곡 중이고, 저는 약간 뒤에 있으려고요(웃음).”

지성과 재능을 갖춘 음악 노마드 고상지. 그녀는 다양한 연주와 컬래버레이션, 작곡·편곡·프로듀서를 아우르며 독창적인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요즘에는 반도네온의 진입경로가 유연해지고 접근성도 용이해졌지만, 처음 그녀가 관심을 가질 무렵에는 악기를 구하기도 배울만한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아르헨티나 여행길에 반도네온을 사다 주셨고, 독학으로 악기를 익혔다고 한다. 무(無)에서 유(有)로 가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기 위해.

“일부러 화성학 공부는 하지 않았어요. 수학적으로 접근하고 구구단처럼 외워버리는 체계를 두고 싶지 않았거든요. 뭔가를 뿌리 깊게 두는 건 별로 취향에 안 맞아서(웃음). 이미 잘못된 교육의 실패를 경험해서 음악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죠. 사실 산수를 잘해서 카이스트에 들어갔지만, 막상 가보니 수학이라는 학문은 그렇게 체계를 머릿속에 주입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무에서 유를 이해하고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죠. 그래서 저는 그냥 곡을 계속 카피해서 감정선들을 몸에 담았고, 건반을 치는 동안 그 감정선에 닿으면 발전시켜나갔어요. 물론 저만의 습득법이고, 당연히 체계를 둔 사람들이 훨씬 많아요.”

그녀는 ‘음악을 위해서’라는 식의 어떤 거창하고 극적인 계기로 학교를 자퇴한 건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밴드 활동을 하면서 음악(특히 작곡)에만 몰두했고, 상대적으로 공부에는 소홀했기에 학교에 남는 건 아니라는 자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신의 선택에 따른 걱정과 두려움 대신 미련 없이 음악으로의 시간으로 이행할 수 있었다. 스스로 만든 인생의 변곡점에서.

그녀라는 흥미로운 노트

어린 시절부터 롤플레잉 게임과 애니메이션의 강렬한 전투 음악, 그것의 체계적인 세계관에 이끌린 발걸음은 독보적인 음악 행보로 연결됐다. 그 길목에서 마주친 ‘탱고’와 ‘반도네온’은 자연스럽게 그녀 음악의 한 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최근에 만난 또 하나의 세계. 명쾌하고 경쾌한 어조로 그녀가 좇아온 음악의 원류는 이제 바로크 음악에 가닿아 있다. 지난해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의 비올라 콘체르토를 듣던 중, 애니메이션 <드래곤 퀘스트>의 OST와 텔레만의 코드 진행이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이다. 거의 시작 한 마디가 키만 다르고 같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텔레만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바로크 음악이 일본의 게임과 애니메이션에 빈번히 차용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어릴 때 애니메이션 음악을 좋아한 것도 코드 진행이 피아졸라와 비슷해서였어요. 사실 처음에는 피아졸라가 개발한 줄 알았는데, 그 이전에 바흐가 있었죠. 피아졸라 음악의 감동적인 요소들과 전개가 좋았지만 그 뿌리는 게임 음악이었고, 그것의 뿌리는 결국 바로크 음악이었던 거예요. 물론 바로크의 드라마틱한 전개와 피아졸라의 그것은 또 아예 다르긴 해요. 이 모든 게 삼각형 구도를 이루면서 좋았던 것 같아요. 음악적 매너리즘을 극복하려면 내년에는 공부를 더 많이 해서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와 바로크 음악을 해보고 싶어요. 카페 떼아뜨로(극장식 식당) 공연도 꾸준히 하고 싶고요.”

그녀에게 있어서 애니메이션은 평생의 관심사이자 음악의 토대이다. 지난해 발매한 정규 3집 <Tears of Pitou>도 1집 <Maycgre 1.0>(2014)과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2집 <Ataque del Tango>(2016)은 탱고 명작 커버 음반). 특히 3집의 공통된 감정선은 만화 <헌터x헌터>에 기인한다고 첨언했다.

“<헌터x헌터>는 연주와 합주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줬어요. 인간(생명체)은 누구나 생체 에네르기를 갖고 있는데, 그것을 사방팔방으로 분산하는 사람들을(악기 쪽이든 공부 쪽) 소위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라고 하고 있어요. 생체 에네르기를 잘 사용하는 능력자의 기술과 수련법이 자세히 나오는데, 음악, 악기 연주와 일맥상통하더라고요. 너무 심오해서 말로 옮기긴 힘든데(웃음), 일종의 무예 같은 느낌이에요. 뭔가에 초집중해서 내 생명이 지닌 것을 쉬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훈련과 모든 가르침이 담겨있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궈낸 음악의 숲은 깊이와 너비를, 농도와 색을 더해가고 있다. 다시, 새로운 세계로의 출격 앞에서 그녀는 씩씩하게 말한다. “계속 시도하고 변해야죠. 작곡가 반도네온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 음악 인생